[성경연구 리뷰] "예수의 제자란, 제국에 저항하는 폭도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것" (신현우)
메시아는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넘어서 신약에서 구원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덧입게 됐다. 마가복음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메시아상은 당대 유대인에게 유행하던 승리하는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다.구약에선 이사야 42장 이하의 고난 받는 메시아에 이러한 사상이 계시돼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계시된 메시아는 이를 한 차원 뛰어 넘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메시아다. 이는 예수님 당대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메시아상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는 네 가지 신학적 방법론이 있다. 그 네 가지는 다중증언 (다른 복음서에 동일한 증언이 있는가), 비유사성의 원리(유대교 및 그 전통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가), 유비의 원리(축귀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믿기 어려운 내용이 광범위하게 보고되고 있는가), 설명가능성의 원리(승리하는 길이 아닌 자발적으로 죽는 메시아를 기록할 이유가 있는가)이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마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은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마가복음 2장에서 혈루증 걸린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그녀를 고쳐주셨다. 그녀는 혈루증 여인과 접촉하게 되면 그녀의 불결함이 전염된다는 기존의 생각을 전환했다. 그녀는 자신은 불결함을 전염하지만 예수님과 접촉하면 그 분의 의로우심이 나에게 전해질 것이란 믿음으로 그런 행위를 했다. 믿음은 구체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을 확신하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 예수를 이용해서 죄를 짓는 일이 빈번하게 자행되는 작금의 현실에 우리는 마땅히 애통해야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믿음을 전복시키셨다. 예수께서 죄인과 식탁 교제를 하는 행위는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예수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죄를 방지하는 소극적 기능에 머무는 반면, 신약의 복음은 믿는 자를 의인으로 만드는 적극적 기능을 수행한다. 죄의 전염을 막는 것에서 의로움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그 기능이 확장되었다. 교회 속에 세속이 침투하거나 이단교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복음에 대한 교묘한 왜곡과 무지다. 예수님은 구약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당대의 유대교의 구약해석과 전통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종교개혁을 통해 태어난 개신교는 계속돼서 개혁돼야 한다.
3장에서 안식일은 매일의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장치다. 그러나 당대의 유대교는 본말이 전도 되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안식일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적으로 삼았다.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정치적 근본주의자는 매우 사악한 존재들이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랑 없이 상대를 배제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큰 죄다. 특별히 안식일 정신에 대한 예수님의 도발적 질문에 대해 “사악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님은 분노했다. 안식일 정신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사회보장제도였다. 애굽의 고된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을 중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예수를 바리새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화석화된 교리와 전통에 얽매인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의 핵심정신을 저버리고 가장 악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근본주의는 오늘날도 득세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초등학교 수준의 지식을 성년 이후에도 고수하는 것이다. 맹목적 확신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뜻대로 사는 자, 즉 증인된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명확히 선포하신다. 마가복음 4장 씨앗의 비유의 목적은 진리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며,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면 몇 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은혜의 원리를 강조한 것이다. 마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새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이 로마 제국을 타도하는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치유, 축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십자가 이전까지 계속 숨기시는 이유는 당대 민중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군사적 메시아로 오인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결의 전염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신약의 복음은 정결의 전염, 곧 의로움의 확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약에서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불결한 것으로 금지된 일이지만 신약에서 시체를 만지는 일은 치유의 사역이었다. 반율법주의는 기독교의 DNA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복음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구약 율법의 올바른 적용과 해석이다.
마가복음 6장의 제자 파송 장면에서 지팡이, 신 등은 출애굽 복장이다. 이는 시각적 메시지를 통해 새 출애굽을 연상시키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새 출애굽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식사는 광야의 만나를, 열두 광주리와 남은 음식은 12지파와 가나안 7부족의 회복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7장은 예수님 당대 유대교가 구약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준다. 손 씻기는 구약에서 제사장의 의무였는데 일반백성에게까지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유는 모든 백성이 제사장이 됨으로써 제사장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광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고르반 전통 역시 부모를 봉양하라는 십계명을 회피하기 위해 악용된 예다.두로 여인은 예수님과의 논쟁을 통해 레위기에서 이방인과 가난한 자에게 보장된 권리를 쟁취한다. 이를 통해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다. 마가복음 8장에는 당시 민중이 열망하던 민족주의적 군사적 메시아에 대한 예수님의 경계가 반복된다.오죽하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를 꾸짖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했을까.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부인이다. 이는 생존권의 포기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제국에 저항한 폭도로 처형당하는 각오를 하는 것이다. 제자는 이런 각오가 수반되는 진중하고 무거운 결단이다.
*이윤구 최세희 기자 (2013 성서한국 매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