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집회 리뷰] 칠흑 같은 역사의 밤을 밝히는 별무리 기독청년들!
우리가 고난에 익숙해지고 푸대접에 익숙해진다면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을 호사스럽게 섬기다보면 우리 양심이 오염되고 하나님나라의 순결한 헌신은 쉽게 좌절 될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과도하게 염려하게 되면 세리가 된다. 지나친 염려는 이기심을 정당화시킨다. 오늘날 우리가 살면서 마침내 승리하고 승리의 열매를 내가 다 먹는 것이라면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내가 모든 고난의 역경을 거친 후에 면류관을 받을 만큼 업적을 남겼는데도 그것을 내가 먹지 못하고 죽어 그 열매가 다른 이들을 위해 쓰여지는 나라이다. 모세가 만일 죽지 않고 망원경으로 여호수아가 잘 하나 감시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세가 거룩한 타살의 종말을 맞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무기력함의 철저한 감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전능을 감추고 변장하신 하나님이다.우리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 고난의 필연성을 논리적으로 확신해야만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적 좌절감. 나사렛 예수적 좌절감을 우리가 선택할 것인가. 가장 진정한 성공에는 그 성공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 무기력한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 부활의 영광이 기대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7-8,10-11장은 선한 의인들의 선패배, 선고난, 선죽음, 수세에 몰림에 대해 보여주고 그 다음에 부활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먼저 고난을 겪고 후에 영광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 이것이 다니엘적 구조이다. 다니엘서에서는 선인들과 정의로운 이들이 수세에 몰려 패배한다. 선한사람들의 필연적 패배이다. 하나님의 대의명분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에 패배를 감내하고 하나님의 무능력을 경험하는 패배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구사하는 모든 폭력과 무법질서와 죽음의 전능성을 다 경험하게 해놓고 마지막에 일망타진하는 방식으로 악을 해결하신다. 왜, 하나님의 무능력이 극대값으로 드러나고 악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12장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칼에 쓰러지거나 불타 죽는다. 하나님은 부활의 소망을 안겨주시긴 하지만, 성도들이 감내하고 있는 이승의 고단한 싸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시지는 않는다. 비로소 부활과 내세 신앙이 자리 잡는다. 다니엘서는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환상에서 시작해 영원히 이어지는 내세적 하나님나라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다니엘서의 12장은 부활장으로서, 극한 환난과 박해 중에서도 영적 지조와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의인들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나라 사상을 제시한다.
오늘날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이긴 후에 그 열매는 죽은 뒤에 먹는 것, 죽음의 폭풍에 쓰려졌다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이다. 죽음의 세력들이 우리를 협박할 때, 그래도 죽음 저편에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며 죽음을 무력화시키는 담력,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돈을 비신화 시키는 것이고 비권력화 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선고난 후부활을 실현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진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과 고난 후에 오는 영광을 터득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성령의 완전한 철수를 초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 앞에 순종함을 바쳤기에, 십자가의 선고난과 후부활을 아는 몇몇 성도들에 의해 교회가 비교적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의 통치를 온몸으로 납득하고 체휼하는 자들, 먼저 고난 받고 먼저 희생하며 묵묵히 부조리를 참아내며 창 끝에 살을 대며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주님과의 공동통치자이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의 열매를 따먹는 것은 세속적인 번영일 뿐이고 십자가의 원리에는 합당하지 않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믿겨져야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죽음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이 땅에서 자신의 열매를 받아먹지 못하나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부활의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어떠한가. 수세에 몰리고 코너에 몰리고 우리의 선한 의지가 배척되더라도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어야 ‘기독교가 이렇다’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하다. 왜 그럴까. 십자가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무기력하게 죽은 후 부활한 것을 진정한 승리로 여기는 깨달음은 성령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선죽음과 선고난, 후영광의 원리를 실현하면서 세상 가운데 비주류로 있다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비주류에서 주류를 비난하지만 이를 대신해서 보여줄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 안에서 돈없음, 비정규직, 결혼하지 못함, 초라함 등 십자가의 도를 알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비애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 자체는 영웅적비애가 아니다. 남모를 비애일 뿐이다. 이런 비애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연대해야하고 같이 비애를 나눠야하고 이 무시무시한 고독을 서로 나누며 함께 가고, 서로 달래고 서로를 높여줘야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아름다운 우정,지지, 격려의 교제권을 만들어야하며 세상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강력한 영적 모집단인 신령한 교회에 속한 개인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우리 기독청년들이 주님을 믿다가 유명하지 못한 길을 걸어가다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선고난, 선죽음, 후영광을 경험하는 세계를 맛보길 원한다. 궁창에서 빛나는 별들이 되길.
*김효진 기자 (2013 성서한국 전국대회 매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