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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7. 17:42

주제 성경 강의 (4일) /
선구자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기


권연경 교수 (안양대학교, 신약학)

들어가는 말
이번 시간은 성경 강해입니다. 여러분은 무조건 아멘 할 태세로 있어서는 안 되고, 저의 강의를 도움으로 삼아 성경 말씀 생각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와 함께 성경의 본문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며, 나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 중에서 히브리서를 본문으로 삼아 참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것입니다.

히브리서: 잘못된 회심에 대한 경고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뜻입니다. 독자들이 히브리인, 곧 유대 기독교인들인 듯싶어 붙인 이름입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설교 전체가 구약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는 점, 그리고 구약의 옛 언약과 예수의 새 언약이 자꾸 대조되는 것을 보면, 아마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향한 설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로 인한 고난이 너무 힘겨워(10:32-34),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던 유대교적 삶으로 다시 “회심”하려는 유혹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도들에게 “뒤로 물러가 멸망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켜 구원에 이르자”고 권고합니다(10:39). 구원을 향해 항해하다가, 그 길이 어려워 돌아서려는 이들에게, 돛을 내리고 물러서지 말고, 고난을 인내하면서 구원의 항구를 향해 계속 항해하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 혹은 “예수를 바라보자”(12:2) 등의 권고들이 이런 갈등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 가지 전략: 신학적 논증, 심판의 경고, 목회적 격려
성도들의 돌아섬을 막기 위해, 저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전략을 사용합니다.
 첫째는 신학적 논증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더 좋다”는 식의 비교급이 매우 자주 나옵니다. 사실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위한 “모형” 혹은 “그림자”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완벽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천사들보다 더 위대한 분이며, 모세보다 더 좋은 언약을 세우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삶이 어렵다고 옛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체를 버리고 그림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힘겨워 선지자의 시절로, 모세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구원을 향한 성숙의 길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돌아서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가 반복됩니다. 신약 중에서 히브리서는 심판에 대한 경고가 가장 자주, 가장 무섭게 등장하는 글입니다. 믿음을 버리고 돌아가는 일이 위험한 것은 그 결과가 심판과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이 구원이 더 크고 좋은 만큼, 여기에 딸린 심판도 그만큼 엄중합니다. 모세의 말도 거역하면 심판을 피하지 못했는데,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 분을 욕보이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심판을 초래하겠습니까? 당장 편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자는, 가슴 따뜻한 격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우리 길잡이로 묘사됩니다. 흔히 “믿음장”이라 불리는 11장에서 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잘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들처럼 우리도 믿음을 지키자고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또 고난 당하셨던 예수님을 상기시키면서, 그와 함께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걸어가자고 힘을 북돋웁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의 “회심”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고, “예수를 주목하자”(12:2)고 힘주어 말합니다. 물론 생각하라거나 바라보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선명한 예수의 그림이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모르는 사람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예수님 초상의 모양에 따라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에 관해 말합니다.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드라마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아래서, 나는 언제나 죄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인 의식”(sinner mentality)이 우리 삶의 전부를 채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인이라는 고백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고백할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것이 그가 하신 일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장면은 다시 빈 무덤으로 옮겨가고, 이야기는 다시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모두 우리에게 중요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그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신학적 편식”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예수님 이야기의 전부를 알아야 합니다.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제자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다른 모습도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초상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다른 그림의 하나입니다. 곧 바로 선구자 예수의 모습입니다.

내가 “이루어 가는” 구원
구원은 은총이지만, 나는 구경만 하는 그런 은총은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그 뒤를 따라 영생을 향한 “좁은 문”으로 가는 일입니다. 지금 내 삶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이요,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얻는다”는 속삭임은, 내가 “사고 쳤을” 때는 듣기 좋은 소리일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복음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아이가 클 때 일입니다. 예전에 맥도날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꽤 어릴 땐데, 자기가 가서 사이다 리필을 받아오겠다고 우깁니다. 1층 내려가는 계단도 가파르고, 컵도 깨질 수 있고,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닙니다. 그래도 자기가 하겠다고 우겨서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따라 오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안 볼 수는 없고, 그래서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자기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우굴거리는 중고등학생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리필 부탁하는 게 어려워 쭈뼛쭈뼛하고, 어렵게 직원 언니와 눈이 마주쳐 “뭐 줄까?” 하니, 그제야 모기 같은 소리로 “사이다 리필이요” 합니다. 여전히 숨어서 올라오는 아이의 표정을 봅니다. 힘든 일 괜히 있다는 표정이었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아마 당나라 십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표정도 그보다 더 의기양양하진 않았을 겁니다. “해 냈다”는 자부심입니다. 못 할 줄 알았는데, 해 냈구나 하는 성취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구원의 한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대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힘겨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합니다. 늘 대신 해 주고 시키는 대로 하는 나이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성숙케 하시는 예수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대신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걸어야 할 구원의 길, 성숙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자라게 하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소개해 줍니다. 바로 “선구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선구자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예수를 “선구자”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선구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2:10).

개역개정판에서는 “구원의 창시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이전 한글개역판에서는 “구원의 주”라고 번역했었습니다. 개역개정의 “창시자” 혹은 “선구자”가 정확한 번역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미래적) 영광으로 이끄시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구원의 “창시자” 혹은 “선구자”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선구자라는 타이틀은 12장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처럼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선구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12:1-2).

개역이나 개역개정판은 이것을 “믿음의 주”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도 정확한 번역은 “선구자” 혹은 “창시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선구자요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깁니다. 이 구절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11장의 결론적 적용입니다.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인내하며 달려가자는 권고입니다. 구원의 달리기에서 우리가 바라볼 결승점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이 믿음의 길을 우리 먼저 달려가셨던 믿음의 선구자이시기도 하고, 또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분, 곧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선구자”이기도 하고(2:10) 혹은 “믿음의 선구자”(12:2)이기도 합니다.
 이 두 구절 말고도, 또 히브리서 6장에서는 “선구자”라는 의미를 그대로 담은 표현을 하나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6:20).

여기서 그리스도는 “먼저 달려가신 분,” 말 그대로 선구자(先驅者, forerunner)로 묘사됩니다. 히브리서는 구원의 길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여정으로 비유합니다. 예전에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그 속에 먼저 들어가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이로써 이 휘장 가운데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6:19).
 “내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이라는 그림으로는 담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구자란 “먼저(先) 가는(驅)”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선구자라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이 가신 같은 길을 뒤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의 사역에는 우리가 뒤따를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신”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속이 구원의 전모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여시고 그 길을 몸소 먼저 가신 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라 구원의 길을 걷도록 하신 분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선구자”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그리스도
선구자는 먼저, 앞장서서 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선구자 그리스도라는 그림 속에는 이 분이 우리와 같은 출발점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시궁창에 그냥 둔 채 혼자서 우리 대신 구원의 묘기를 부리는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가 있는 시궁창 속으로 내려와 여기서부터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내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선구자 그리스도 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움직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의 가신 길은 그대로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와 다르기도 합니다. 그는 아담처럼 죄 아래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죄의 유혹을 극복함으로써 구원을 향한 길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엮어 예수를 “대제사장”이라는 그림으로 묘사합니다. 구약 시대 제사에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이 사람만 일 년에 한 차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백성을 위해 피를 뿌려 속죄합니다. 물론 이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선택된 사람입니다. “모든 대제사장은 사람 중에서 택한 자이므로 ...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할 수 있습니다(히 5:1). 그가 “그릇된 길로 가는 무지한 사람들”인 백성들을 받아주고 우리를 “너그러이 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인간이라 사람들의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자의 첫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느 대제사장과 다릅니다. 구약시대처럼 레위와 아론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 아니라, 계통이 아예 없는 멜기세덱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뒤를 잇는 대제사장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멀고, 하늘보다 높이 올리우신” 분입니다(7:26).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하고, 그 다음 백성을 위해 속죄하던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그는 흠 없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갖는 제사를 드리셨습니다(7:27). 약점을 가진 인간 제사장들을 세운 옛 언약과는 달리, 새 언약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7:29). 이 두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선구자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나를 따르라” 하셨다면, 그건 불가능한 부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우리 옆에 서서,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가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따라 갑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합니다. 그를 “대제사장”이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으니까, 연약한 우리들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인용했던, 선구자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2장 10절을 다시 봅시다. 여기서 구원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향해 가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혼자서는 못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 계신 곳으로 데려 가려고, 우리가 사는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깁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도하실 “구원의 선구자” 혹은 “구원의 개척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완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구원자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완전한 자격을 갖추신 것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이 고난 중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혈과 육을 가진” 우리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분도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고난으로부터 영광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11-13). 그래서 예수님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2:14).
 혈과 육을 지닌 우리들의 삶은 한 마디로 “죽음의 공포 아래서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2:15). 이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이는 마귀입니다(2:14). 예수님이 이런 삶의 조건 속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 곧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2:16).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셔야만 했습니다”(2:17). 그래야만 우리를 위해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처럼) 시험 당하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2:18).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갖고 은혜의 보좌로 나갑시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될 자비로움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4:15-16).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는 분입니다. 우리가 힘겨워할 때,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도 안다”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힘겨울 때 우리는 종종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나 하니?”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단절시키고, 우리를 고독과 불안에 빠지게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이길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모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무의미하고, 늘 고백하던 하나님의 사랑도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내 딸을 그렇게 불쌍하게 죽게 하나?” 하는 분노감뿐입니다. 모두 뭐라 위로할 말이 없는데, 그 중에 나서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몇 해 전, 역시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야 했던 분입니다. 긴 말을 할 것도 없이, “나도 안다”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나눕니다. “나도 그렇게 아팠고, 지금도 그렇게 아프다.” 이 고통의 나눔에서 우리는 희망의 빛, 구원의 가능성을 경험합니다.

죄를 극복하신 그리스도
위에 인용한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잘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아담은 시험을 당했고, 실패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시험을 당했고, 실패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온갖 시험과 유혹에 직면하여 삽니다. 그리고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죄가 없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죄에 때 묻지 않아 순결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가 시험을 당하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 오히려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그를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복음서의 시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시험을 당했지만 거기 굴복하지 않고 이겼습니다. 사탄의 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강조하는 것처럼(5:12-21), 그리스도의 순종하심, 바로 이것이 우리 구원의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히브리서도 바로 그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5:7).

이 대목은 우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지만, 그 때 뿐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의 삶은 늘 시험의 연속이었고,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고난 속에서 거기에 굴복하여 죄를 짓는 대신,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우리와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입니다.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는 그의 삶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거룩한 죽음이기도 하지만, 몸소 순종을 배워 실천하는 과정, 이를 통해 스스로 완전해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5:8).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고 말합니다(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어차피 순종하게 되어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의 순종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순종이 자동적이지 않은 삶의 수준으로, 유혹과 시험 가득한 삶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존재로서 그는 친히 고난을 겪으며 순종하는 법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구원자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셨습니다(9절).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5:9-10).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우리 죄를 대속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우리 구원이라면, 이처럼 위험하고 복잡한 과정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길을 걷지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듯, 우리가 영광 곧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의 좁은 문을 들어가 좁고 힘든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몸소 겪으며 개척하고 열어 둔 길을 따라 나를 좇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믿음이라 부릅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응답입니다. 그래서 이는 “순종”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이라고 말해도 좋았겠지만, 굳이 순종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과 불신앙,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선택이 불가피한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예수를 믿는 행위는 불가불 세상의 길 대신 예수의 길을 선택하는, 세속적 영광의 길 대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결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 예수께서 열어주신 바로 그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근거로 다가옵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폴 포츠나 수잔 보일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성공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들이 우리들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있다가도 그렇게 올라갈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서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승리”란 바로 그런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빨간 망토의 수퍼맨으로 우리를 낚아 올리는 대신, 뿔테 안경을 쓴 신문기자 아저씨로 우리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런 모험이 필요했던 것은, 우리 자신이 이 싸움 속에 있고, 우리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마귀에게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당하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순종하셨고, 이로써 우리도 또한 죽음의 공포와 그로 인한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10:20).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9절). 그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믿음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열어주신 좁은 문으로 기꺼이 들어가게 만드시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 분 뒤를 기쁨으로 따라오게 만드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보통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입니다(11절).

양심을 깨끗게 하는 새 언약의 제사
이제 우리는 본 강의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우리를 순종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구약시대의 성전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비교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더 나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장이라 불리는 11장을 제외하면, 좀처럼 설교 본문으로 선택되지 않습니다. 가히 신약성경의 레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논점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제사는 새 언약입니다. 언약이니까 구약의 언약과 같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죄를 다루듯, 예수님의 십자가도 죄를 다룹니다. 그런데 언약이지만 “새” 언약입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은 율법에 기초한 구약의 언약과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 언약이 흠이 없었다면 새 언약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8:7). 그래서 새 언약의 도래는 옛 언약의 기초인 율법의 마침을 의미합니다(8:13). “전에 있던 계명(=율법)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기하고...”(7:18).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 필요했던 것은 레위 계통을 따른 제사제도 자체에 근본적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7:11, 14). 이 결정적 결함은 “연약하고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연약하고 무익하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근거한 첫 언약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7:19). 율법과 옛 언약은 우리를 완전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순종하게 만든다는 말과 통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순종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언약은 이 점에서 다릅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순종하여 스스로 “완전하게” 되셨고, 또 그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12:2). 첫 언약의 율법은 연약한 약점을 가진 인간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지만, 복음은 친히 순종으로 온전해지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7:28). 새 언약의 차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라본 새 언약의 기대
“옛 언약” 혹은 “첫 언약”이 사람들을 순종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입이 닳도록 했던 이야기입니다. 사실 미래의 “새 언약”을 고대하고 바라본 것도 구약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도 새 언약에 관한 구약 예레미야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8:8-12 = 렘 31:31-34). 하나님은 언젠가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8절). 그런데 이 새 언약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맺었던 옛 언약과는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언약 때는 언약을 맺었어도 백성들이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에(렘 17:9),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이기에(렘 13:23), 이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이 불순종과 인간의 악한 마음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언약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매우 멋진 비유로 표현합니다.

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다가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동족을 가르치려고,
주님을 알라고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8:10-11).

옛 언약은 율법이 백성들의 마음 밖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언약을 맺는 순간부터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율법을 돌판 아닌 백성들의 생각 속에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다 새깁니다. 물론 이는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의 본래 의도가 성취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이야기가 현실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서로 “하나님을 좀 알아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순종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예수의 제사
히브리서는 예레미야가 고대했던 이 새 언약이 예수님의 제사를 통해 성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신의 흠 없는 피를 드려 이루신 제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생각에 넣어 주고, 그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불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려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표현을 빌면, 돌처럼 굳어서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마음”을 “양심”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뜻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사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이 드린 제사의 차별성입니다. 구약의 제사라고 죄를 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예법”이기는 하지만(9:10), 그 나름의 속죄 기능을 수행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합니다(9:13).  하지만 이 제사는 새 언약을 위한 “그림자”일 뿐, 참 실체는 아니었습니다(10:1). 그래서 이 제사는 “완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10:2). 지은 죄에 대한 임시적 해결책은 될지 몰라도, 죄를 짓는 사람 자체를 어떻게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선지자 식으로 말한다면, “새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이고,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기능은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9:9). 만약 구약의 제사가 우리 양심/마음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제사 드리는 자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다시는 죄를 깨닫는 일이 없게 되었을 것이며,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10:2). 이 제사는 죄 지은 육신을 깨끗케 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의 죄를 늘 되새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죄인 된 우리 존재를 바꾸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지저분한 강물에 생기는 거품은 구약의 제사로도 걷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제사는 강물을 건드리지는 못합니다. 제사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옛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10:4, 11).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몸을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옛 제사가 없애지 못했던 죄를 위해 자기 피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10:12). 곧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10:14).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은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히브리서는 다시 예레미야의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제사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 생각에 기록하리라는 약속을 성취하신 제사라고 선언합니다(10:16). 아까 말한 강물의 비유를 다시 쓰자면, 예수님의 제사는 거품을 걷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거품의 근본 원인인 강물 자체를 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복음에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처럼, 예수님이 천사보다, 모세보다 낫다고 말할 이유도 없고,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구원이 구약의 구원보다 “더 크다”고 주장한 근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모세보다 크시고,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더 낫고” 우리의 구원은 구약보다 “더 큽니다.” 지금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이 점에서 자신감이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핍박 속에서 실패의 경험을 반복하면서, 십자가의 효력에 대한 믿음이 떨어진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차라리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드리신 제사의 우월성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거룩하게 되는데,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9:13-14)

물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해줍니다. 이것을 대속(代贖)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도 여러 번 이 점을 분명히 말합니다(9:18-23). 하지만 대속이 중요한 것은 거기에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우리가 죄와의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빚을 지고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없는 것처럼, 죄를 지고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해 줍니다.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언약의 약점이었고, 바로 이것이 새 언약의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요 약속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육체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예수의 피가 뿌려집니다. 에스겔이 고대한 “새 마음”이요, 예레미야가 노래한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곧 예수께서 자기 몸을 드려 이루신 제사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갈 3:13-14). 로마서에서는 생명의 성령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8:1-4).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으로 살던 삶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의의 종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롬 6장). 이것이 새 언약의 약속, 복음의 약속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내 죄를 용서해준다는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나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부담스럽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100세라는 아브라함의 늙은 나이는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능력을 가진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롬 4:17).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제사를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제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여 예수께 순종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잘 믿기지 않습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내가 계속 짓는 죄나 사해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으로만 만족하고 싶습니다.  
 다른 곳에서 저는 이런 태도를 두고 복음의 “하향평준화”라고 불렀습니다. 제대로 못하니까 안 해도 되는 쪽으로 복음을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은혜”라는 말로 부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순종의 요구는 신약성경에서도 엄중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글에서도 그런 생각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종의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장 자주 경고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고전 6:9-10; 갈 5:21; 엡 5:5 등). 그래서 히브리서도 거듭거듭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반복합니다.
 오히려 복음은 참된 순종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를 순종케 하시는 예수, 곧 선구자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는 예수 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선구자 예수, 우리를 용서하는 예수 뿐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기대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당당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내가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앞서서 걸어가신 선구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분의 뒤를 따라 기쁨과 감사와 인내함으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복종하며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는 바울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이 궁금한 사람들은 필자의 책, <행위 없는 구원? - 새롭게 읽는 바울의 복음>(서울: SFC, 2006)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속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리 앞서 걸어가신 선구자적 여정의 절정이기도 했습니다. 갈보리는 죄 용서를 인해 감격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힘을 내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결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 죄인 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온전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선구자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오늘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선구자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같이 시험당하고, 나와 같이 힘겨워하셨던, 그러나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이제 내 손을 잡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 예수님을 마음에 깊이 되새기면서(3:1) 혹은 바라보면서(12:2),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일어섭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열정과 결심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은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12:1).

현실이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있지만, 그럴 때에 우리는 나와 같이 고난당하신 예수, 그러면서도 그 상황을 이기고 순종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2-13).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13:12-13).


* 권연경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BA), 미국 풀러신학교(MDiv), 미국 예일대학교(STM),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PhD)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섬기고 있다.
* 본 강의안은 2009 성서한국대회 자료집에 실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