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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7. 17:49

주제 성경 강의 (6일)
진정한 회심을 찾아서: 미국 교회사를 중심으로



배덕만 교수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I. 서론

      회심은 구원의 첫 관문이다. 교회사에서 회심은 시대별로 다양한 용어로 대체되어 사용되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16세기종교개혁 시기에는 신자의 법적 지위의 변화를 지칭한 ‘칭의’(justication)이, 17세기의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에서는 신자들의 실재적 변화를 강조한“중생”(regeneration)이, 18세기의 감리교운동에서는 본질적 변화를 강조한“신생”(new birth)이, 그리고 20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는“거듭남”(born again)이란 말이 유행했다.   물론, 회심이 기독교의 전부도 아니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회심은 구원이 필요한 모든 인류에게 결정적 사건이며 경험이다. 시작이 반이고,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 중요하듯, 구원의 첫 관문인 회심을 올바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시에 회심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고, 그 가치실현에 실패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 및 교회와 사회 전체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역사적 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가 자신의 신앙적ㆍ신학적 정체성을 숙고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회심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되새기고, 그것의 현재적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며 중요하다. 따라서, 이번 강의에서는 미국교회사에 나타난 회심의 다양한 모습을 역사적ㆍ신학적으로 검토하고, 이것을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상황에 조심스럽게 적용해 보고자 한다.   

II. 본론

1. 17세기 미국 청교도와 ““회심””
1607년에 영국인들은 미대륙에 최초의 식민지 버지니아를 건설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1620년에 영국 청교도의 플리머스(현재는 미국 북부의 메사추세츠 주에 속해 있다) 상륙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는다. 물론 이것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유도한 역사 왜곡이다. 당연히 남부인들은 1607년의 버지니아 건설을 미국의 기원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1620년에 미 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영국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급진적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성경에 근거한 신정국가를 추구했던 칼빈의 이상을 자신들의 고국(영국)에서 동일하게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영국 왕을 중심으로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던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벽에 막혀 좌절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군의 급진파들이 영국에서 개혁의 꿈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실패한 개혁의 꿈을 미국에서 실현하고자 분투했다.
그들은 온 세상의 모범이 되는 ““언덕 위의 도성””(City upon a Hill)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한결같이 성취되는 진정한 신정국가를 꿈꾸었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오직 중생한 신자들로만 구성된 참된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중생한 신자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와 사회 모두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도록 도모했다.

또한 청교도들은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을 자신들의 핵심적 신학으로 수용하고, 이 신학을 청교도 사회건설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 사용했다. 흔히 청교도를 포함한 개혁주의 그룹은 예정론을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히 드높인 반면, 인간의 책임과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조된 것이 소위 ““계약신학””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상으로,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로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미국에 상륙한 청교도들은 이 계약신학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적용했다. 개인과 하나님,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과 국가 간의 관계에 말이다.     
결국, 청교도들은 미 대륙이 전 인류를 향한 거룩한 빛이 되길 소망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한 무한한 믿음, 성경에 대한 깊은 신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비전,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중생의 필요성, 그리고 신학적 근거로서 계약신학 등을 토대로 거룩한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거룩한 꿈은 이후 비 청교도 이민자들의 수가 급증하고, 청교도들 마저 세대가 지나면서 1세대의 비전과 열정이 약화됨으로써,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2. 18세기 제1차 대각성과 회심
미국을 만국의 제사장 국가로 건설하고자 했던 청교도들의 거대한 꿈은 불신자들의 증가와 이교도들의 유입, 그리고 세월의 변화란 현실의 장벽 앞에서 허물어졌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거룩한 꿈이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오히려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이 물결을 되돌리려는 예언자적 시도들도 끊이지 않았다. 비록 신정국가로서 청교도 사회는 붕괴되었지만, 이념과 이상으로서 청교도 정신은 죽지 않았다. 이 정신을 부활하여 사회개혁을 꿈꾸던 이들을 통해 18세기 중반에 제1차 대각성운동이 발생했다.
이 운동의 깃발을 올린 사람은 뉴저지에서 화란 개혁교회의 부흥을 주도했던 시어도어 프렐링후이젠(Theodorus J. Frelinghuysen, 1691-1747)이었다. 화란 이민자들 교회에서 목회했던 그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목회했던 교회는 고단한 이민생활에 지친 이들이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던 곳이었다. 교회의 오랜 회원들이었지만, 정작 신앙체험이 전무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이런 교회를 상대로 ““중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설교했다. 신앙체험을 중시하는 그의 설교와 목회는 교인들 내에서 지지자와 적대자 모두를 양산하며, 그의 교회는 극도의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이런 현실적 장애 앞에서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영적 갱신을 통한 교회의 부흥을 추구했다. 결국, 그의 열정이 교인들과 교단 지도자들을 감동시켜, 그의 교회는 놀라운 영적, 양적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뉴저지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은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 1703-1764)였다. 그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의 영향력 있던 기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테넌트의 장남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밀집해 살던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교리적 신앙에 대한 대안으로 ‘통나무 대학’(Log College, 후에 프린스턴 대학교가 됨)을 설립하여 체험중심의 신앙운동을 주도했다. 길버트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목회했던 지역에서 프렐링후이젠을 만나 개인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결국, 이런 개인적 인간관계를 통해 체험중심의 신앙생활을 몸에 익히게 되었고, 신앙생활의 핵심으로서 ‘중생’의 가치를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테넌트는 이런 확신을 통해 자신의 교회와 인근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열정적으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의 영적 침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들””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목회자들의 회심을 강력히 촉구했다. 기성교회를 향한 그의 이런 설교는 당시 목회자들 내부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지만, 많은 성도들은 그의 설교에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이들과 동시대에 부흥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영적 갱신운동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부흥운동이 미국교회의 영적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다.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 교회를 물려 받아,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된 에드워즈는 고귀한 영성과 천재적 지성을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가 목회했던 메사추세츠의 노샘턴교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청교도적 유산을 상실하고, 점차 신앙이 형식화되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적 태만이 만연해 지면서 교회는 깊은 영적 침체기를 맞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장기간 동안 ““중생과 심판””을 집중적으로 설교했고, 그의 현란한 수사학과 심오한 영적 통찰을 겸비한 설교에 그의 교인들은 처절한 회개와 각성으로 반응했다. 곧 그의 영향력은 인근지역의 교회들 속으로 급속히 파급되었고, 열광적 지지자와 강력한 반대자들이 동시에 출현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진정한 열매가 상실된 감정적 열광주의를 비판하고, 동시에 성령사역의 정서적 측면을 간과하는 냉소적 합리주의도 정교하게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성령체험은 사랑과 겸손이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며 부흥신학을 정교하게 다듬고, 후대까지 그 영향이 미치도록 견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사실, 프렐링후이젠, 테넌트, 그리고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은 그들의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적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역의 부흥운동을 전국적 차원의 대각성운동으로 확장시킨 것은 바로 영국에서 건너온 순회설교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5-1770)의 공로였다. 그는 영국의 복음전도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영향을 깊이 받은 성공회 목사였다. 그는 웨슬리를 통해 체험적 신앙의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탁월한 설교가, 천재적 배우, 건전한 사회사업가였던 그는 이름뿐인 신자들을 향해 중생의 복음을 강력히 설교했고, 교파의 장벽에 갇혀 교회분열을 주도했던 목회자들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 차례에 걸쳐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부흥회를 인도함으로써,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던 부흥의 불길을 하나로 통합하여 전국을 강타한 대각성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결국, 휫필드는 중생을 통해 진정한 신자를 탄생시키고, 그들의 연합을 독려하며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사업을 추진하여, 복음의 구체적 실천을 추구했던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에드워즈의 제자요 미국에서 노예제도폐지운동의 선구자가 된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 1721-1803)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의 가장 탁월한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홉킨스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목회하면서,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과 사회개혁을 결합하는 신학과 신앙운동을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의 죄를 이기심 혹은 이기적 행동으로 이해하면서, 참된 기독교적 덕성은 ““비이기심,”” 혹은 ““비이기적 자선행위””(disinterested benevolence)로 구성되며,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증거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회심과 자선활동을 동시에 강조한 홉킨스는 금주운동, 선교운동, 그리고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특별히 그는 흑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이며,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교회와 미국 모두에게 커다란 수치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현재 그는 미국에서 노예제도에 저항했던 최초의 미국인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제1차 대각성운동은 청교도의 이상이 점차 미국인들의 의식과 삶에서 사라지던 위기의 순간에 터진 영적 갱신운동이었다. 이를 위해 수 많은 위대한 목회자들이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며, 그들은 공통적으로 형식적 신앙의 각성을 위해 ““중생””의 메시지를 강력히 설파했다. 신앙을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 이해하거나, 예배 참석을 신앙생활의 전부로 간주하고, 교회회원권을 천국시민권과 동일시하던 당대의 종교적 관습을 강력히 비판하며, 진정한 회심을 신앙생활의 요체로 제시했다. 이런 그들의 체험중심적 설교는 청중들의 죽은 신앙을 되살리면서 교회의 영적 양적 부흥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사가들은 이런 신앙적 부흥이 타 민족들로 구성된 미국사회 내에 최초로 공동운명체로서의 민족적 자의식을 갖게 했고, 이후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정치적 독립에 모든 민족그룹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내적 동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3. 19세기 제2차 대각성과 회심
   제1차 대각성운동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부흥과 희망의 열정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그러들었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합리적 사상이 확대되고, 산업혁명의 영향력이 증폭되며, 독립 이후 국가건설의 부담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확장되는 변방은 미국의 꿈이 실현되는 희망의 공간이었으나, 동시에 인디언들과의 갈등 및 노예제도의 모순이 확대되던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다. 영토와 국력의 확대는 신앙의 위기 및 교회성장의 정체란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런 시기에, 미국교회와 사회를 되살리는 영적 운동이 출현했다. 제2차 대각성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1800년에 발생한 예일대학의 부흥을 살펴보자. 예일대학은 하버드대학이 계몽주의 영향 하에 전통적 청교도 신앙을 버리고 이신론 및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로 경도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립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이 예일대학 출신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길버트 테넌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도 이런 흐름을 대변하는 증거다. 그러나 1800년에 예일의 상황은 그런 과거의 전통 및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심각한 영적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에 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손자인 티모시 드와이트(Timohty Dwight, 1752-1817) 목사였다. 그는 예일의 학생들 대부분이 중생의 체험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종의 “총장특강”시간에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학생들과 씨름했다. 결국 수년에 걸친 그의 집요한 노력을 통해 서서히 학생들 안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예일대학 내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수 많은 학생들이 회심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미래를 헌신했다. 이 예일대학의 부흥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이때 회심을 체험하고 헌신한 학생들 중에서 많은 유능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어, 한 세대 내에 미국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들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라이먼 비처(Lyman Beecher)다. 그는 미국에서 금주운동을 시작하여 사회개혁을 주도했고, 새로 개척된 서부에 레인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여 새 시대를 대비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 모두가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로 성장했다. 특히, 그의 아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는 당대 미국 최고의 설교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딸 헤릿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는 <톰아저씨의 오두막 집>이란 제목의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노예해방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엘리트주의란 비판이 뒤따를 수도 있겠지만, 예일대학 같은 지성의 요람에서 부흥이 일어난 결과, 향후 미국교회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미국교회와 사회를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제2차 대 각성운동의 중요한 유산이다.

둘째, 케인리지 부흥회는 1800년 장로교 목사인 제임스 맥그리디(James McGreedy)의 집회에서 기원하여, 1801년 장로교 목사 바튼 스톤(Barton Stone)의 주도하에 켄터키의 캐인리지에서 열린 집회에서 절정에 달한 강력한 부흥운동을 지칭한다. 이 집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교회나 강당이 아닌 숲 속에서 부흥회가 개최된 것이며, 둘째는 한 명의 목회자가 아닌 여러 명의 목회자들이 수 많은 군중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동시에 설교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매우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에 놀라운 오순절적 신비현상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몸을 떨고, 소리를 지르며, 황홀경에 빠지는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 부흥은 동부의 안정되고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새로 개척된 서부의 거칠고 황량한 문화 속에서 발생했다. 부흥회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예일대학의 지성인들이 아니라, 새로운 개척지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사이에 성령이 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런 부흥의 영향으로 후에 미국 남부는 소위 “바이블 밸트”(Bible Belt)로 불리는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요새로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발생한 부흥운동에 주목해 보자. 전직 변호사 출신인 피니는 목사 안수 후, 뉴욕 북부지역의 순회전도자로 파송을 받았다. 후에 “불타는 지역”(the Burn-over District)으로 알려지게 된 미국과 캐나다 접경 지대에서, 피니는 연속적으로 전도집회를 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경이적인 결과를 낳았다. 정교하고 논리적인 설득력과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사학적 능력을 겸비한 피니는 사람을 관통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치 청중 한 명 한 명을 지적하듯 설교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들이 제단 앞으로 나와 구원의 은총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피니의 부흥회가 지닌 보다 큰 중요성은, 이 집회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이 당시 미국의 가장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 즉 노예제도, 여성차별, 도시빈민, 음주, 매춘 등의 문제를 개혁하는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주목할 만한 결과를 창출했다는 사실이다. 피니 자신이 이런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시대적 개혁에 대한 교회의 사악한 태도”라는 설교에서 피니는 개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이렇게 설파했다.

나의 사랑하는형제들이여, 이런 경향들에 대해, 즉 소외, 분열, 불신을 초래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며, 부흥을 방해하고, 이 땅을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는 원인들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체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형제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이회개하고 정직해지며,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해 공적ㆍ사적으로 인정하고, 우리의 공식적인교회 기구들을 통해 공식적인 결의안을통과시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잘못된 것들을 철회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단에서, 언론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가능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들이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지은 죄들,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것, 노예들과 술 취한 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모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애정이 부족했던 것, 그리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 등에 관하여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제2차 대각성운동은 30여 년에 걸쳐 미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의 운동들은 성령에 대한 강력한 믿음에 근거해서 개인의 변화를 추구했다. 지성의 요람인 예일대학 교정과 캔터키의 거친 광야에서, 성령을 통해 사람들은 극적인 변화를 체험했고, 이런 변화는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변화를 위한 중요한 동력으로 기능했다. 또한 피니의 부흥운동은 개인신앙의 부흥과 사회개혁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함으로써, 교회의 부흥이 사회 전반의 개혁으로 확장되는 경이적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통전적이며, 성령을 통한 개인의 변화 또한 총체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4. 19세기 후반 부흥운동과 회심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사회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남북전쟁의 결과, 미국은 형식적 통일은 유지했으나, 내적으로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특별히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남과 북, 흑인과 백인, 부자와 빈자,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수 많은 문제들이 사회의 양한 영역에서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부흥운동의 전통이 지속되면서 개인의 내적 변화와 함께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흐름을 주도했던 흐름 중 하나가 성결운동이었다. 성결운동은 1830년대에 시작되어, 1860년대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890년대에는 다양한 교단을 탄생시키며 제도적 틀을 완비했다. 본래 이 운동은 감리교회가 미국의 최대교단으로 성장하면서 제도화의 길에 접어들자, 초기의 열정적 신앙을 회복하려는 영적 갱신운동으로 출현한 것이다. 따라서 초기에 이 운동은 ““성령세례””를 강조하며, 존 웨슬리가 강조했던 성화(혹은 성결)을 체험하고자 했다. 개인의 내적 성결에 대한 강조는 자연적으로 사회적 성결에 대한 지각으로 이어졌고, 그런 인식의 확장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성결운동을 시작했던 푀미 팔머(Phoebe W. Palmer, 1807-1874)는 감리교 평신도 여성사역자로서, 성령세례에 기초하여 여성사역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구약의 예언(욜2:28-29)을 토대로, 말세에 사역자의 자격은 제도권의 인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성령세례 체험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체험에는 성, 인종, 사회계급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초기 성결운동에서는 많은 여성사역자들이 출현하여, 교회의 부흥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성결운동은 빈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나사렛교회와 구세군 같은 교단들은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도시빈민을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나사렛과 구세군이란 이름을 선택한 배후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들의 깊은 관심이 작용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성결운동은 오순절운동과 분리되었다. 성결운동 내부에서 ““성령세례””를 능력으로 이해하고, 그 증거로 방언을 강조하는 그룹이 출현하자, 성령세례를 내적 정결로 이해했던 기존의 그룹과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교단이 분열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오순절운동은 단지 개인의 영적 체험에만 집착하는 광신집단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은 성령세례를 통한 개인의 극적 변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방언과 신유를 동반한 강력한 영적 체험은 당대에 팽배했던 수 많은 사회적 장벽과 한계를 극복하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오순절운동은 수 많은 흑인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초기에는 백인과 흑인, 인디언, 스페인계,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림으로써 인종통합을 성취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지도력을 인정했고, 대공황시절에는 빈민구호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평화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다. 심지어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비록 오순절운동이 근본주의적 종말론을 수용하여 신학적 차원에서 사회개혁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견지하기도 했지만, 이 운동의 강력한 신앙체험은 신학적 통제와 사회적 통념, 심지어 국가권력의 위협을 극복하며 주요한 사회적 목소리로 기능했다.       
19세기 후반에 미국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무디(D. L. Moody, 1837-1899)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디는 제대로 된 교육, 목사 안수도 받지 못했지만, 19세기 후반에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위대한 부흥사였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여행하며 ““중생””의 복음을 강력히 선포했다. 그는 영국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인 케직사경회를 미국에 도입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그룹 내에서 성결운동에 버금가는 성령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무디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예언운동을 후원하여 근본주의 신학의 태동과 세계적 선교운동의 출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특히, 무디는 당대의 대표적 복음주의자들인 토레이, 피어슨, 고든, 심슨 등과 협력하여, 성령운동과 선교운동, 그리고 근본주의 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무디는 개인의 중생과 영혼구원에 집중함으로써, 사회개혁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의 영향 하에 수 많은 청년들이 조선을 비롯한 복음의 불모지에 선교사로 헌신하여, 20세기에 복음의 세계적 확장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들 중에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 같은 인물은 교회연합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따라서, 무디가 외쳤던 중생의 복음은 개인의 영적 변화의 차원을 너머, 세계 선교와 교회연합운동으로 귀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부흥운동은 19세기 초반에 비해 규모와 강도에 있어서 더욱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남북전쟁의 충격으로 염세적 세계관이 출현하고, 영적 체험의 사유화 현상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그리고 무디의 부흥운동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모순 및 문제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시대적 적응력도 보여주었다. 이 운동들이 강조한 영적 체험은 개인의 내적 변화를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도시화 현상으로 인한 도시빈민문제, 그리고 인종, 전쟁, 계급, 자본 등과 관련된 시대적 난제들에 대해 예언자적 태도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회심의 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5. 20세기 복음주의의 회심
20세기는 인류문명상 가장 많은 변화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과학(특히 생물학과 의학)과 기술(특히, 통신과 운송)의 발달,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해방을 향한 다양한 목소리, 인본주의의 약진 등으로 교회는 정신 없이 한 세기를 보냈다. 특별히 성서비평학과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문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고,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은 교회의 목회에 근본적 재고를 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처참한 전쟁과 자본의 독점은 삶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뒤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선 교회는 다양한 그룹으로 분열되며, 갈등과 공존의 실험을 하게 되었다.

먼저, 20세기 초반에 미국 복음주의를 장악했던 흐름은 근본주의였다. 근본주의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자유주의 신학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주의자들이 성서무오설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결합하여 이론적 토대를 구성하고, 이에 부흥운동 그룹을 포함한 보수주의자들 간의 대 결집을 유도함으로써 현실적 파워를 확보한 보수적 신앙운동이다. 근본주의는 이런 신학적 전제 하에, 일체의 사회개혁을 거부하고, 주류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며, 보수신학의 전통을 전투적으로 보존하려고 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에 치중했다. 그들의 눈에 과학의 발전, 학문의 진보, 그리고 사회개혁운동은 모두 세속적 인본주의의 산물로서, 하나님 나라에 위배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역사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책임을 감당하기 보다, 신앙을 사유화하고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주목할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대표적 근본주의자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 Bryan, 1860-1925)의 경우다. 그는 미국 근본주의 탄생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던 1925년의 유명한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을 공격하고 창조론을 옹호했던 장로교 평신도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그는 가난한 민중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민중주의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국무장관을 지냈고, 3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특별히 그는 미국에서 금주운동을 주도하여, 제18차 헌법수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것은 신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를 당연시하는 우리의 선입견에 결정적 수정을 요구하는 매우 중요한 예가 된다.   

근본주의가 주도하던 20세기 초반의 복음주의는 20세기 중반에 출현한 신복음주의로 인해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신학적 유산을 공유했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에 대해 보다 탄력적으로 반응했고,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빌리 그래함, 칼 헨리, 헤롤드 오켕가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신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분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과학과 학문의 발전에 대해 보다 탄력적이고 관용적 태도를 견지했다. 당시 풀러신학교의 총장이었던 헤롤드 오켕가는 ““사회적 메시지를 소유한 근본주의””란 의미에서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란 용어를 고안해 냈다. 신복음주의의 신학적 기수로 큰 족적을 남긴 칼 헨리는 1847년에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을 발표하여, 근본주의자들이 개인적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포기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부흥회에서 개인의 거듭남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인종평등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호소했다. 결국, 신복음주의는 복음전파를 위해 교단 및 신학의 장벽을 극복함으로써 근본주의와 관계를 단절했고, 성령체험 중심의 성결-오순절교단을 포용함으로써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보존했으며, 세심한 주의 하에 선택적으로 성서비평학을 수용함으로써 신학적 탄력성을 확보했다. 또 사회의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책임적 발언과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사역의 통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 보수적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 동안 근본주의적 신앙을 고집하여 사회/정치문제에 관심을 억제해 왔던 보수그룹들이 적극적으로 미국 정치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 ““종교적 우파”” 혹은 ““기독교 우파””로 명명되는 이들은 인종차별문제로 미국 정부가 기독교 학교들에 강제력을 행사하고, 미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충격적”” 현실을 목격하면서, 전통적인 분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고, 정치에 적극적/조직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개인적 회심, 영적 신앙체험, 개인의 도덕적 순결성 등을 강조함과 동시에,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거대한(?) 비전을 품고 있다. 주로 동성애와 낙태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으로서 미국의 절대지위를 맹신하며, 공화당과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사안에 따라 다른 신앙을 가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과의 연대도 불사한다. 팻 로버트슨, 제리 폴웰, 제임스 케네디, 제임슨 돕슨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며, 로날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 같은 인물을 백악관의 주인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수신앙과 미국의 보수적 정치신념을 동일시하면서, 보수기독교가 미국의 국가종교로서 기능하도록 허용해 왔다.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내에 종교적 우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기독교와 공화당의 유착을 완성한 종교적 우파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폄하하는 진보주의자 모두를 비판하면서, 소위 ““보수적 신앙+진보적 정치””를 지향하는 그룹이 존재한다. 이들은 ““복음주의 좌파,”” ““진보적 복음주의,”” ““급진적 복음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되며, 기본적으로 미국의 부흥운동 전통을 존중한다. 회심과 영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도덕적/신학적 순결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빈곤, 평화, 인권(여성 및 유색인종), 환경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사회를 향해, 교회의 제사장적 기능과 함께 예언자적 책임을 대단히 중시하며, 상대적으로 민주당과 정책적 친밀감을 유지하고,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집중한다. 짐 월리스, 토니 캄폴로, 브라이언 맥클라렌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최근 바락 오바마의 집권 이후, 미국에서 위상과 영향력이 급증하고 있다.
이처럼,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과 상황’ 혹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 면에서 거대한 변화를 경험했다. 사회가 더욱 복잡하게 분화되면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대응방식 및 태도 또한 다양하게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신앙과 보수정치를 획일적으로 동일시하는 보수그룹과 보수신앙과 진보정치의 연결가능성을 실험하는 진보그룹으로 크게 양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그룹 모두, 회심한 기독교인이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인식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그 책임의 내용과 실천방법 면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지만 말이다. 

III. 결론

이상에서 미국교회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시대별로 회심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했다. 미국교회에서 나타난 회심의 다양한 모습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 이미 한국기독교는 한국의 주류종교로 입지를 굳건히 했고, 영향력도 급증하고 있다. 반면, 한국사회는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와 한계를 노출하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회심을 통해 한국교회가 자기갱신에 성공하고,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상의 역사적 관찰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먼저, 한국교회는 회심의 다양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회심을 개인적 혹은 영적 차원에 한정하여 이해해왔다. 그러한 획일적 이해 때문에, 한국사회 속에서 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처럼, 회심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영적 차원과 물리적 차원을 동시에 지닌다. 개인이 영적인 존재이면서 육적인 존재이듯이, 또한 개인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영적 회심은 물리적 삶에 영향을 끼치고,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로 연결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회심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심을 추구해야 한다. 회심은 단순한 감정적 체험, 혹은 지적 동의 이상의 차원을 지닌다. 회심은 삶의 근원적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회심을 파편적으로 이해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추구했던,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이성, 감성, 그리고 의지가 총체적으로 변화되는 회심””이 한국교회에서는 제대로 추구되지 못했다. 진정한 회심은 성도의 총체적 변화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도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결국, 한국교회가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충격 및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진한 것은 그 많은 교인들 중에 진정한 회심을 체험한 ““진정한 신자””(real Christian)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상적 차원의 회심을 극복하고, 진정한 차원의 회심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회심의 구체적 결과를 증거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의 회심이 지적, 심리적, 혹은 정서적 차원에 머물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매우 현실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실천 없는 회심은 무의미하다. 회심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라면,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 거듭남, 돌이킴, 그리고 전환은 삶 속에 구체적 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개인적 성품, 가치와 목표, 삶의 방식과 태도 등에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동안 한국교회가 회심의 결과를 교인의 교회출석에 한정하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지금 회심해야 한다. 회심이 과거의 일회적 사건일 필요는 없다. 또한 미래의 모호한 비전으로 연기될 이유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회심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은 항상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진지한 의식 속에 살아야 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체험을 해야 한다. 따라서 어제의 실패에 함몰되어 절망 속에 방황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긴장을 풀고 타락해서도 안 된다. 폴 틸리히의 말처럼, 우리는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회심과 씨름해야 하는 일차적 이유다.

* 배덕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문학사), 서울신학교 신학대학원(목회학석사),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드류대학교(철학박사)에서 공부했으며, 미국교회사를 전공했다. 현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의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주사랑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미국 기독교우파의 정치운동>(넷북스) 등의 책을 썼고, <다시 보는 복음주의 유산> 등의 책을 번역했다.
* 본 강의안은 2009 성서한국대회 자료집에 실린 원고입니다.